그 사람들한테 우리는 가축이요,
뺏어도 화내지 않고 때려도 반격하지 않으니까.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살아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웹툰 '송곳' 중에서
제목에서 드러나듯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기초적인 규정이다. 자본주의 체제인 대한민국을 하나의 주식회사에 견줘볼 때 이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특히 집도 없고 정규직도 아닌 이들은 더군다나 ‘주주’가 아니다. 대기업 대주주나 임원, 고급 공무원, 땅부자, 고액 재산 보유자 등만이 주주다. 그리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은 “오로지 주주들의 배당금 극대화만을 위해 분투”할 뿐이다. 주주가 될 가능성이 없는 임금 노예들은 “그저 주주 배당금 극대화의 ‘재료’”가 된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주식회사에 견주어본다면 상황은 더욱 명확해진다. (주)대한민국의 주주는 누구인가? "경영 참여는 꿈도 못 꾸고, 하라는 대로 잔업과 특근을 하느라 일주일 실질노동시간이 50~60시간이나 되는, 40대 이상 되면 근골격계 질환이나 신경질환을 앓게 되는 대한민국의 '피곤한 노동자'들은 과연 '주주'인가?"(11쪽)
대기업의 대주주나 임원, 고급공무원, 혹은 땅부자 등 고액재산보유자들이야말로 (주)대한민국의 진짜 주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들은 서로 겹치거나 혼맥 등 긴밀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기까지 해서 매우 공고하고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러기에 (주)대한민국은 기업 중에서도 악질기업이 되기 쉽다. 오로지 주주들의 배당금 극대화만을 위해 분투할 뿐, 피고용자에 대해서는 그저 주주 배당금 극대화의 '재료'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특히 대기업-하도급중소기업으로, 정규직-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경제구조를 보자. 재벌들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직접 고용을 하며, 대부분은 각종 하도급, 영세업체에 고용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거나 비정규직 혹은 '알바'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고용 형태의 차이가 아니다. 의료, 교육 등 본인의 생존과 자녀의 성장에 가장 필요한 사회적 서비스부터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제대로 꾸려나가기 힘들다. 실업수당,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적 임금들은 그 지급 기간이 짧거나 조건이 까다롭거나 생활이 불가능한 작은 액수다. 결국 정규직 직장이 없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비정규직 양산은 현대판 천민계급 만들기와 다름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1부 지옥의 논리'는 '헬조선'을 떠받치고 있는 논리들을 살펴본다. 경제력을 중심으로 차별하고 서열화하는 모습, '생존'이라는 미명 아래 양심보다 이윤을 추구하는 모습, '능력'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스스로를 착취하는 모습 등을 살펴본다. '2부 그들이 원하는 세상'은 '박근혜 시대' 우리 사회 주류세력의 모순과 한계를 집중 분석하고, '3부 씨줄과 날줄: 병영국가, 민족주의, 식민성'에서는 '박근혜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 사회 기저에 깔려 있던 인식들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4부 문제는 국가다'에서는 대안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적어도 재분배 기능, 자본에 대한 견제, 보완 기능은 갖춘 국가로 나아가자고 외친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10쪽) 하지만 여기서의 정치란 단순히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기본적 구조와 그 구조를 유지하려는 지배계층의 힘, 그리고 그에 맞서는 피해대중들의 저항력. 이 두 거대한 힘이 서로 맞서 그 사이에서 어떠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정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고, 특히 최근의 진보정치 약화는 바로 이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해답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공통의 책임의식을 공유하는 자율적인 개인들 사이의 연대만이 살릴 수 있을 것이다"(33쪽)라고.
*박노자 저, '주식회사 대한민국' 서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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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말고
각자 개인들이 직접 나서서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오직 그 방법 밖에는 없다.
먼저 탐욕의 괴물이 된 기득권력의 1차 장벽을 무너뜨리는 개인들인 '송곳'과 그 다음 긴 시간을 두고 장벽 안쪽의 사회 기저 시스템으로 스며 들어가 기득권력자들의 '무양심 무한탐욕'시스템을 내파시키는 개인들인 '이끼'.
이 송곳과 이끼는 단체나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 오직 각자 개인들의 의지로만 가능한 방법이다.
부패한 시대의 기득권력을 무너뜨리고 사회를 리빌딩하는 시민들의 저항 원동력은 기득권력에 의해 조작된 '자유와 평등'을 깨고 넘어서서
생명을 본질적으로 중시하는 '조화와 질서'라는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삶 자체로 바꿀 줄 아는 '송곳'과 '이끼'들 한 명 한 명에 의해 만들어진다.
*비빔 박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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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 "먼저, 우리는 자유무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인된 협정은 자유무역 협정이 아니며, 고도의 치밀한 보호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투자자를 위한 권리 협정입니다. 투자자와 기업에게 특혜를 주는데, 주요 대기업에게는 아주 높은 보호 관세를 주죠. 지적 재산권은 본질적으로 관세예요. 많은 경우 이는 교환될 필요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소위 말하는 자유무역협정은 투자자들에게 그들이 투자하는 나라에서 특별한 권리를 갖도록 특혜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미국 회사는 멕시코에 투자를 할 때 자기들도 멕시코 회사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 이 경우 멕시코 회사들은 자유무역으로 얻는 이익이 아무것도 없어요. 사실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상호작용들은, 어떤 종류의 무역도 자유롭거나 공정하지 않습니다.
자유무역협정은 오직 자본에게만 보다 싼 값으로 생산하고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이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촘스키가 예로든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도 자동차의 핵심 기술 부분은 미국 본사에서 조립하고, 나머지는 임금이 싼 멕시코 공장에서 조립과 도장을 마친 후에 미국 시장으로 가져와 판매하는 방식이다. 관세 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생산 단가를 낮추고 이윤을 높였다.
촘스키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이 부르는 전형적인 결과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대중 봉기가 이어질 것이라 경고한다. 그의 설명이다.
"아랍의 봄(2010년 12월)은 수많은 대중이 내린 결단이며 반신자유주의 운동입니다. 이와 같은 물결은 이미 10년 전 남미에서도 일어났죠. 1990년대 남미 정권은 신자유주의 원칙을 철저히 떠받들며 지켰어요. 국민들은 그 전형적인 수순에 따라 고통받았습니다.
신자유주의가 한 국가에 안착되면, 매우 빠르게 경제위기로 침몰해갑니다. 자유무역협정은 그 위기를 재촉하는 한 부분이고, 투자자들의 온갖 이윤을 만드는 영리한 규정들로 가득하기에 일반 대중은 봉기로 저항하게 되는 겁니다."
안희경 :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촘스키 : 민주적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 한국에서는 이런 질문이 이미 제기되었었죠. 한국은 심각한 준파시스트 개발 상태 속에서 매우 용기 넘치는 고된 싸움으로 그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전두환의 독재 말입니다. 한국이 그 길을 이끌었어요. 이는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기에, 그 수업을 기억하기란 쉽고도 쉬운 일입니다.
촘스키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혁명을 당부한다. 한국인이야말로 억압의 구조를 깬 증거를 만든 이들이기에 쉽게 돌파구를 찾을 거라 기대하며 덧붙였던 말이다.
"봉건 제도를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리지 못하였지만, 그 속에서 어떤 기회라도 가질 수 있던 이들은 자식들만이라도 봉건 시스템 안에서 높은 자리로, 권력의 부분이라도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걸 행복이라고 쫓았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권위와 통치의 시스템이 있고, 당신이 그 시스템을 받아들인다면, 선택은 오직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위로 올라갈까'라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싱가포르를 봅시다. 선진 산업사회죠. 그 사회는 존재 양식이 파시스트 상태와 가까워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권위주의, 고문, 억압이 있죠. 그런데도 젊은이들은 그 시스템 안에서 상승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안은 그것을 깨트리는 것뿐입니다. 민주적 혁명을 이뤄 내는 거예요."
안타깝게도 4년 전, 촘스키가 제기한 문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무엇이 민주적 혁명일까?
우리는 지금 성장은 둔화되고 고용은 창출되지 못하는 질서 속에서도 성장을 향한 돌파구를 찾는다. 약자의 터전을 발판 삼아 강한 부문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분주하다. 식량 자립도는 뒷전으로 밀리고, 세계시장 돈의 흐름을 쫓아 이윤을 붙잡기에 국내 산업은 부문 부문 상시적 구조조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이제 이 흐름에 더욱 분명한 제동을 걸어야 할 때다.
사려 깊은 '나의 선택'은 얽힌 세상의 망을 출렁일 수 있다.
내 주변에서 신자유주의적 문화를 거둬내고, 사회 속 정치 경제적 강자독식의 질서를 탐구하고 바꾸고자 행동한다면, 민주주의 혁명을 당부하는 촘스키의 정성은 기회를 얻지 않을까?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 우리가 만든 변화를 기억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민주주의 '그대의 목소리를 찾아라'
노암 촘스키와 안희경씨의 대담 글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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