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와 D 사이의 C
1화
최고조
“동생분의 신장 기능이 10%도 안 남았습니다.”
순간, 최고조의 표정이 굳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네에…? …아… 어릴 때 급성 감염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하나가 기능상실 됐었는데…
이제 그 남은 하나마저도 그렇게 되다니…”
의사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피습당한 부위가 안타깝게도 신장 쪽이었고, 괴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예? 지금… 이식 수술이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의사의 말은 명확했지만, 최고조의 머릿속은 멍해졌다.
상담실을 나와 병원 복도를 걷던 최고조는, 힘없이 벤치에 주저앉았다.
최고조의 귀에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말만 계속 맴돌았다. 마치 선고처럼.
(아… 그때 토벌대 반장 형님 말만 믿고 신전 코인에 몰빵한 내가… 진짜… 천하의 못난 놈이다.)
“아~~~~~!!”
고개를 감싸쥐며 소리쳤다.
그제야 비로소 현실이 들이쳤다.
미진이는 의식불명 상태.
수술이 급하고,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
며칠 전이었다.
미진이는 괴한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고,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미진아… 제발… 조금만 더 버텨줘.)
최고조는 이를 악물었다.
“벌어야 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전 토벌 구인 광고들을 미친 듯이 검색하기 시작했다.
[월성 2성급 신전 대규모 모집. 초보도 지원 가능]
[후포 2성급 신전 토벌대 상시 모집, 숙식 제공, 오버 수당 업계 최고]
[양양 2성급 신전 토벌 대장 모집. 길드 소속원 동반 참가 가능]
[고리 3성급 신전 토벌대 대원 모집, 지인 동반 특전, 장비 대여 가능]
[울진 3성급 신전 토벌대장 모집. 연맹 공인 P.K. 보유자 우대]
[영광 3성급 신전 토벌대 상시 모집. 먹튀, 선점, 선별 입장 없으니
많은 지원 바람]
“ㅆㅂ! 어떻게 된 게 전부 사설 토벌대만
있냐, 섬멸대 연맹 공채는 안 뽑나?”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은 섬멸대 연맹이었다.
좀 더 안정적으로 돈을 벌려면 이곳에 들어가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유리한 선택이었다.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거제도 3성급 수중 신전 오픈.
보어공 긴급모집. 일당 3배 보장.
내일 새벽 5시까지 도장포 선착장에
집결]
“일당이 세 배라고?"
분명히 엄청 위험한 신전인 것 같은데,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지원서를 보냈는데, 금방 답장이 왔다.
<축하드립니다. 채용에 합격하셨습니다. 첨부한 안내문 참고하시고 출발 시각 엄수하시기 바랍니다.>
◆거제도
“여보세요... 최고조 씨 맞으신가요?”
“네에 그렇습니다만...누구신지...”
“현장지원팀 소속의 캔디스라고 합니다.
변경 사항때문에 긴급히 연락드렸습니다.
앞서 안내한 신전이 밤사이에 갑자기 여차 해변으로 쉬프트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어허...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되나요...”
“아, 네. 지금 승합차가 계신 그곳으로 출발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신전 전체가 통째로 옮겨진 건 처음이었다.
잠시후에 승합차가 도착했다.
“최고조 씨 맞으시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좌석에 앉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아아... 너무 졸린다...”
순식간에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아브락사스!≫
(이잉?)
≪아브락사스!≫
(뭐야? 어디서 나오는 소리지?)
≪아브락사스! 선택의 이유를 증명해라!≫
(갑자기 뭔 개소리여?)
≪선택의 이유를 증명해라. 아브락사스!≫
(당신이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선택 어쩌고
저쩌고 씨부리냐고! 피곤에 쩔어서 단잠 자는
사람을 깨우고 말야! 싸가지가 없네!)
≪아브락사스… 너는 이미 선택했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다. 증명만이 남았다.≫
(이쒸! 자꾸 똑같은 말 씨부리...)
“최고조 씨, 최고조 씨!”
“에에?”
“최고조 씨, 최고조 씨. 여차 신전에 도착했습니다. 일어나세요!”
“에에?... 뭐가요? 도착했다고요?...”
너무나 생생한 꿈을 꿨다.
(뭐지? 이렇게 실감나는 꿈을 꾼 적이 없었는데... 미진이 걱정 때문에 그런가... 아니...근데, 뭘 자꾸 증명하라는 거야...
살다 살다 별 희한한 꿈을 다 꾸네...)
◆여차 신전
“최고조 씨 맞으시죠?
혹시 개인용 장비 갖고 오셨을까요?”
“아···아뇨···”
사실 보어공이 자신에게 최적화된 개인용 장비가 없다는 게 쪽팔리고 말이 안 되긴 하지만 형편이 가장 안좋을 때 동생이 중상을 입는 바람에 진료비를 대느라 어쩔 수 없이 갖고 있던 고사양 장비를 모두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모든 보어에 끼워 사용할 수 있는 호환용 부속품과 소형 보어를 가방에 넣어왔다.
“네, 그러면 장비 대여소에 가셔서 신분증 맡기시고 보어와 완충장갑 받아 가십시오.”
해당 신전에 대한 토벌권을 부여받은 사설 용병단은 현장에 출근한 일용직 대원과 보어공에게 필요한 장비 대여와 물품 지원 그리고 작전수행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신전내 특이사항 등을 공유한다.
신전이 쉬프트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증이 폭발해서 지나가는 현장 지원팀 직원을 붙잡았다.
“저기 죄송한데요··· 처음에 수중신전이라고 했는데 어디쯤에 있던 신전이 여기로 쉬프트했는지 아시는지···”
“아... 그게... 저도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제가 듣기로는···
해금강 십자동굴 근처 바다 밑에 신전이 열렸었는데...
밤사이에 갑자기 신전 전체가 이곳으로 쉬프트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아하... 그랬구나··· 보어공으로 여러 군데 뛰어 봤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봤거든요...”
“아 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라 아직도 실감이 안나네요...”
이곳에는 해변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 산중턱 한면이 잘려나가면서 고속도로 터널처럼 큰 동굴이 새로이 생겼다.
이 동굴이 해저 침매터널처럼 바닷속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어서 앞으로 신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길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닷속에 있어야 할 것이 산을 찢고 올라왔다는 사실이,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을 남겼다.
“최고조씨, 보어와 완충장갑 나왔습니다.”
(웬일이야... <저붐 브레이커>를 다 주네...)
보어 중에서도 두께 1미터의 금강석을 2분 내에 깰 수 있는 T2급 보어를 대여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저붐 브레이커>는 그중에서도 최상급이다.
최고조는 장비 대여소에서 건네받은 저붐 브레이커 몸체에 뺨을 대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반려동물을 대하듯 촉감을 느꼈다.
‘역시! 대단한 물건이야! 웬일로 이 좋은 걸 다 주냐?
아까 개꿈 꿔서 찜찜했는데 장비운빨은 나름 괜찮은데?’
좀전까지 근심이 드리웠던 얼굴에 웃음기가 싹 돌았다.
최고조는 신전 입구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무언가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하는 듯했고, 그의 등 뒤로는 산의 어둠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침내 멀리 수평선에 해가 떠올랐다.
어둠이 다 걷히고 햇빛이 신전 입구를 비추었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불리는 신비한 광석 <신타마늄>은 우리나라에 골디락스 시대를 열어 주었다.
전세계가 역대급 경기호황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예상하지 못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최근에 신전에서만 출몰하는 왐져들의 개체수가 폭증하면서 수많은 토벌대 대원들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점점 신전 토벌에 참가하기를 꺼려하게 됐고 그만큼 신타마늄 채광량은 줄어들었다.
토벌대로 참여한 용병들이 신전 입구쪽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 이제 들어가는가 보다.”
최고조는 대원들이 모이는 곳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자아~ 모두 주목!”
송곳단이라는 사설 용병단 소속으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강두호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자, 선발대 출발!”
(저 대장은 P.K.가 꽤 높겠는데...)
최고조는 강두호 대장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보어공들은 다른 대원들보다 팔근력이 좋긴 하지만 전투능력시 발휘되는 종합 측정단위인 P.K.는 매우 낮거나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 20 P.K.로 측정된 자가 있었다고 들었던 게 전부다.
최고조는 강두호 대장의 P.K. 수치가 얼마나 될지 그리고 실제 전투 능력은 어떤지 궁금증이 또 폭발했다.
만약 매우 광폭한 왐져떼가 기습해 온다면 강대장이 어떻게 놈들을 격파할지 진짜 궁금해졌다.
(아 몰라! 그냥 대장만 믿자...)
“최고조씨!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저 선발대를 놓치면 언제 우리 목이 달아날지 몰라!
절대 놓치지 말고 잘 따라 가야 한다고! 알겠지?”
옆에서 걸어가던 토벌 대원이 대뜸 최고조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끔 말을 걸어줬다.
대개 신타마늄 광상(鑛床)에 도착할 시점에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왐져 떼를 선발대가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보어공이 그때부터 채광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길이 세 갈래로 나눠지니까 어쩔 수 없이 팀을 나눠야 한다!“
강대장의 말이 떨어지자 토벌대 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세 팀으로 나뉘어졌다.
“자, 1조, 2조는 좌, 우 통로로 들어가고 3조는 나와 함께 가운데 통로로 들어간다.
1조, 2조 조장들은 긴급 상황 발생 시 단 1초도 주저하지 말고 즉시 나에게 통보해.”
“네! 알겠습니다!”
“자,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도 무사히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알겠나!”
대원들은 일제히 엄지와 검지로 링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곳에서는 소리를 내면 적에게 곧바로 노출되기 때문에 모두 폐쇄형 송수신 장치를 헬멧에 장착하고 있다.
각 통로별로 최대 100미터 지점까지만 들어갔다가 분광기로 신타마늄과 왐져들의 흔적을 파악하고 즉시 여기로 다시 돌아온다. 알겠나?!”
“네!”
대원들은 일제히 외쳤다.
결국엔 대장이 저 중에서 한 곳만 선택해서 집중 공략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어공이 최고조 혼자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강두호 대장의 외침이 끝나고 대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이 속한 조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최고조는 3조에 배치되어 강 대장과 함께 중앙 통로로 들어가게 되었다.
입구는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습한 공기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조심해. 여기부터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 눈이 있을 거야." 강두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앞장섰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에 있는 저붐블래스터를 쥐고 있었다.
최고조는 보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오늘 채광하지 못하면, 미진이 수술 날짜는 더 밀린다.
중앙 통로를 따라 약 4~50미터 정도 들어가자, 어둠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긁히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땅을 긁으며 기어오는 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왐져들이겠죠?"
최고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마도"
강대장은 목소리를 낮춘 채 주변을 살폈다.
"대원들, 준비해. 언제든 덤벼들 수 있으니까."
대원들이 몸을 낮추고 무기를 고쳐 잡는 순간,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칼날 왐져다! 모두 조심해!”
강대장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금속성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병들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저붐블래스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셋, 둘, 하나···”
하재훈은 긴장된 숨을 내쉬며 사격 준비를 마쳤다. 순간, 어둠을 가르며 칼날 왐져가 튀어나왔다.
네 개의 발이 지면을 찍는 순간마다 불꽃이 튀었고, 거대한 앞발의 칼날이 무시무시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좌측으로 유인한다! 은주, 오른쪽 견제해!”
강대장이 지시하자 나은주가 재빠르게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불빛을 쏘아 올렸다.
칼날 왐져의 붉은 눈이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향했고, 하재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저붐블래스터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강렬한 섬광과 함께 광선이 발사되었고, 왐져의 앞발을 스쳐갔다.
그러나 왐져는 오히려 더욱 흉폭해진 듯, 날카로운 울음을 내지르며 대열을 향해 돌진했다.
“뒤로 빠져!” 강대장이 외쳤지만, 이미 왐져는 중간 거리를 넘어섰다.
“나와라!”
박소희가 소리치며 단검을 꺼냈다.
그녀는 몸을 낮춰 왐져의 움직임을 피하며 칼날이 스치는 순간 단검으로 왐져의 옆구리를 찔렀다.
칼날 왐져가 반격하려는 찰나, 뒤쪽에서 터진 저붐블래스터가 다시 한 번 왐져를 강타했다.
“이제 끝내자!” 윤진혁이 외치며 강력한 에너지 모드를 발동시켰다.
하재훈과 나은주도 동시에 발사 준비를 마치고 왐져를 정조준했다.
강렬한 에너지 광선이 한꺼번에 발사되며 왐져를 삼켰다.
고요가 찾아왔을 때, 대원들은 흙먼지 사이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다.
“다들 무사하나?” 강대장이 말했다.
“네, 무사합니다.”
나은주가 대답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붉은 빛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 저기에! 칼날들이 또 있다!”
다급하게 외치는 최고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붉은 눈동자들이 통로 깊은 곳에서 줄지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놈들은 돌진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듯 일정한 간격으로 멈춰 서 있었다.
마치,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최고조의 귓가에서 낮은 속삭임이 다시 울렸다.
≪증명해라.≫